'진보와 보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10.06 [펀글]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꼬집은 글중의 하나...
[특별기고]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허물어진 ‘죽은 양심의 시대’
입력: 2008년 09월 17일 15:08:56
우리 사회는 파시즘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접된 어떤 예감이 하시라도 닥쳐올 수 있는 사회이다.
‘촛불’을 위시한 미래적 힘과 사회진보적 역량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역으로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자본에 포섭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 자본의 힘이 흔들릴 때 한국 사회는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공황상태로 접어들 것이고 파시즘적 그 무언가에 기댈 가능성도 짙다.
경찰이 촛불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돈이 지고의 가치가 된 순간부터 진보와 보수는 ‘하나’가 되었다. 관료들에게
통제당하던 재벌들이 어느 순간 관료들을 끌고다니는 역전극이 벌어지는 순간, 한국 사회는
새로운 체제로 돌입했다. 전 국민의 증권화, 영어에의 올인은 상징적 사건들일 뿐이다.

외형적으로는 노무현 정권의 진보성과 현 정부의 보수성으로 나누어서 판단하고 일정 부분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노정권이 진보적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일상적 파시즘을 경계하는 논의가 활발했고 부분적으로는 성공한 측면도 있지만,
생활양식으로서의 파시즘적인 태도가 지난 10여년간 숙성되어 갔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등장은
지난 10여년의 결과가 빚어낸 열매일 뿐, 우연은 아니다.

사회 진보의 속내는 결코 시대를 뒤따라가지 못하였다. 멍청하게 대처했던 여당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주당은 정체성도 없이 지리멸렬하고, 선진당과 창조한국당 같은 짝퉁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분명히 뒤로 돌려놓았다. 시민단체는 많지만 시민은 별로 없고, 진보정당은
둘이나 있지만 젊은층은 별로 없고, 환경운동가연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환경은 더욱 더 나빠지는
식이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지난날 종로5가의 진보적인 목회자들의 민중신학 전통은
어디로 가고 낡은 미국식 근본주의신학만이 떨치고 있을까. 한국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종교간의 분쟁 조짐이라는 기가 막힌 현실은 어쩌면 필연적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제 문제를 오늘의 단기지속의 결과물로만 보는 것은 그야말로 근시안이다.
한국 사회는 ‘섬’이다. 남한 사회에서 외국을 나가려면 반드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
절반이 휴전선에 막혀 있는 이상 결코 대륙에 딸린 한반도가 아니라 섬나라일 뿐이다.
인맥·지연 따위로 얽혀진 섬답게 늘 작은 일로 분노하고 흥분하고 들끓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건
섬나라는 쏠림이 강하다. 한반도라는 통일적·대륙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나,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섬으로 살아왔다는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해양사적으로는 반도도 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들끓는 한국 사회를 우리는 그저 ‘냄비근성’식의 감성론으로 치부해왔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관심을 표명하고 주식 등 경제에 관심을 갖지만, 정작 표를 까보면
정치의식 수준이 현저하게 낮고 부동산 투기 중심의 천민자본주의형이다.
이웃 일본을 섬나라 근성이라고 구박하지만 정작 우리가 섬나라 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만 모를 뿐이다. 섬나라에서는 논란도 뜨겁지만 냉각도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일치단결·대동단결된 흐름으로 촛불을 만들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물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파시즘적으로 흘러갈 가능성,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 조건과 조짐은 충분히 보인다.

첫째, 우리 사회에 반(反)합리성이 강화되고 있다. 사기, 여타 범죄를 일으켜 감옥에 가는
경우도 있지만 반합리적인 논리로 살아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러한 반합리적 세력이
견고한 연합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귀족-자본-군부등이 견고한 연합전선을 폈던
스페인의 파시즘처럼, 한국 사회도 비슷한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반합리성이 연대를
형성하면 위험사회가 되고 만다. 가령 작금의 대북문제가 그러하다. 반합리성이 우리 사회를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면 불행하게도 연합을 형성한 몇몇의 선택 그룹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흐려지고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파시즘의 본령은 인간 불평등 자체를 지지하는 바, 불평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을
미덕으로 찬양하는 사회로 진입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평등’이라는 말은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금칙어가 되었으며 무능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명품, 브랜드 가치 따위의 구호는
상업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가치의 우선이다. 세계 경제력 10대 순위 국가라는
국가 홍보는 범람하지만 사회 안전장치는 후진국이다. ‘개천에서 용나는 일’은 사라진 지
오래며, 각종 인적·문화적·물질적 자본으로 무장한 상위층에 의해 ‘수월성’이란 이름의
특권적 교육선택권으로 전환된 지 오래다. 선택된 ‘우월한 종자’는 선택된 교육의 결과,
멕시코형의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불평등의 대표격은 비정규직 문제이다. 이만한 한국 사회의 뇌관도 없다는 생각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하대하며,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 자체를 거부하는 노조가
다수라는 것은 뇌관이 ‘자본-노동’ 대립 이전에 노동자 내부에도 존재함을 말해준다.
노동자계급 자체가 소시민화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소시민화는 20세기 벽두의 독일
노동자계급이 그러하였듯이 파시즘 발호의 더할 나위없는 토양이 될 것이다.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들과의 대응방식은 ‘학교-비정규직 강사’ 이전에
‘정규직 교수-비정규직 강사’와의 1차적 ‘노예’관계이다. 이런 구조는 조교 연구자의
사용화(私用化)로 일상화되었다.

셋째, 일상적 파시즘이 생활양식으로 내재화하고 있다. 폭력은 폭력을 가하는 자와
폭력을 당하는 자, 모두의 삶을 망가뜨린다. 한국 사회의 일상적 폭력과 법적·정치적 폭력은
사회 전체를 폭력으로 길들여가고 있다. 백주테러의 형식을 갖춘 구사대의
폭력, 정치적 폭력, 언론에서의 폭력 등이 만연되고 있어도 사회적으로 무감각하다.
워낙 강력한 폭력에 길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폭력들은 ‘다른 세상’일 뿐이다.
국가적 폭력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폭력에 길들여진 소시민들은
잠시 동안은 분노하지만 본질적 분노는 표하지 않는다. 진정한 분노는 자신의 주식값이
떨어졌을 때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한때는 스포츠와 권력, 스포츠와 정치 등의 제 관계를 되묻고 고민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사라졌다. 88년 전통에서 월드컵으로, 베이징올림픽으로
나날이 스포츠는 고공 행진이다. 스포츠 강국으로 모든 것을 만회하려는 듯,
축구에 흥분하고 야구에 놀라고 수영에 뒤집어진다. 국민 건강과 직결된 생활체육은
온전히 개인의 부담이며, 비만문제에서조차 빈부 격차가 벌어진 지 오래다.
몸을 둘러싼 파시즘, 혹은 국가의 개입이 일상화되어 있다. 황우석 집단을 비롯한
지난 수년간의 윤리적 논쟁은 인간의 몸과 생명을 둘러싼 과학집단과 국가-자본의
개입 결과일 뿐이다. 국가가 인간의 몸에 개입할 수 있는 파시즘적 양상을
황우석사태는 너무도 충분히 보여주었다.

넷째, 한국인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적 측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외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국인, 한국 문화의
협한화로 귀결되고 있다. 왜 협한화일까. 한국인들은 미국인·서구 유럽인은
좋아해도 흑인이나 동구 유럽인은 깔본다. 매케인을 반대하면서도 정작 흑인인
오바마를 지지할 수 없다는 백인층의 고민 비슷한 것을 한국의 중산층도 지닌다.
재미동포는 여전히 대우받지만 재중동포나 이른바 고려인들, 탈북자 또는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인들은 3등인간일 뿐이다. 오래 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런 인종차별이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파시즘의 가장 대표적 형태 중의 하나인 인종주의에서 한국인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반영한다. 한국 사회 노동계급의 하부단위 40만명이 외국인이지만 ‘
고용허가제’로 통제되어 불법체류인이 양산된다. 수십만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만
사용자인 일반시민 다중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식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유럽 극우파시스트식의 직접적 폭력은 없어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나을 것이 없다.

한국 자본은 베트남 투자 1순위를 기록하면서도 현지에서의 일상적 노동착취에 전념한다.
제국 아류로서 그 역할을 해내고 있을 뿐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국내 진보단체들은
이들 문제를 등한시하고 있다. 1970년대, 마산·창원 공단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횡포를
적극 고발하였던 일본의 양심적 활동가 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거의 없다.

세계화·국제화? 미국은 잘 모르겠으나 유럽 국가에서 한국학을 주전공으로 가르치는
교수 요원이 불과 10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부하는 한류는 고작 베트남 따위에 머물며,
그 한류라는 것이 얼마나 허위의식으로 가득찼는가는 이 지면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한류의 미국과 유럽 진출, 현재 구조로는 불가능하다.

파시즘은 여성의 몸과도 관련된다. ‘수입 색시’가 싼값에 ‘구매’되고 가정 폭력으로
이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러시아와 필리핀 여성들이 매춘 조직에
인계되어 혹독한 조건에서 몸을 팔고 있어도 우리의 중산층 중심 여성운동의
논의 중심은 못된다. 저평가된 아파트값 상승을 고려하면서 장안평 ‘창녀 소탕작전’에
환호를 보내는 주민들에게 창녀는 창녀일 뿐이다. 매춘녀, 매매춘녀 등
그럴싸한 표현은 사실 허구이다. 오늘도 수많은 남성들이 룸살롱의 ‘몸의 식민지’에서
‘제국의 일상’을 보내며, 골프채를 둘러메고 아시아의 또다른 식민지에서의 섹스관광에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이라크 파병 등에서 보여주었듯이 한국인들은 국제적 책무나 도덕적
연대에 무감각하다. 외국의 모든 군대가 빠져나가도 나홀로 지키겠다는 한국인들의
불필요한 의무감은 일찍이 베트남 전쟁터에서도 발휘되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은
망각으로 대체되었으며, 한국은 미국이 관계하는 전쟁마다 늘 투입전야 태세이다.
지구상에 이런 ‘5분대기조 국가’가 있을까. 국제적 용병으로서의 이미지만 굳히고 있는 중이다.

다섯째, 다중의 소시민화다. 경제적 이득만 된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것이
망가져도 좋다는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환경운동의 오랜 축적에도 불구하고
새만금 따위는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도도한 지역주의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그 어떤 환경논리도 뛰어넘었다. 구두선으로 환경을 되뇌지만 막상 자신의 지역에
문제가 되자 경제논리만이 앞섰다. 자신들의 뼈를 묻을 화장터 하나 세우는 데 전
시민이 대동단결해 반대하는 나라가 세계에 또 있을까. ‘님비’라고 간단하게 표현하지만,
경제속물적 판단일 뿐이다.

학력으로 인한 피해를 적잖이 본 입장에서 극도의 입학경쟁을 막아야 할 처지에 서 있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경쟁관계 지지에 나서고 있다. 대학과 초·중등학교, 사설학원집단은
연합을 형성하고 있으며 학부모들은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람사르 총회를 유치한다고 떠들썩하면서 불도저로 우포늪 외각을 허물었다.
근대문화유산을 역설하면서도 일제시대 서울시청 건물을 무너뜨렸다.
문화유산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600년 전란도 피해온 숭례문을 태워버렸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지만 결과는 매번 완패다. 불은 날 것이고 문화재는 파괴될 것이고
자연은 황폐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티즌의 흥분과 분노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망각이란
병이 온 사회를 감염시킨다. 망각은 한국 사회가 지닌 고질병이며 시도때도 없이 발병하는
만성병이다. 과거사 청산에 대한 논란과 식민지근대화론의 정체도 과거를 깡그리 잊은
온갖 망각병의 산물이다. 망각은 파시즘으로 가는 좋은 토양이다.

파시즘이란 결국 야만으로 가는 길이다. 그토록 열렬히 촛불을 드는 한국 사회의 건강성이
설마 그런 야만의 길을 갈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짐’은 충분하다. 분단국가인 데다 하나의 고립된 섬이다.
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유사시에는 가공할 폭력이 가해질 가능성이
상존하는 나라이다. 필자의 주장이 과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필자의 전공분야로
되돌아가 마무리를 해보자.

인문학을 살린다고, 살려달라고 곳곳에서 난리다. 학술진흥재단은 지난 10여년을 관통하면서
대단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어떤 대학도, 어떤 연구자도 지원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운 학회 살림, 연구소 살림에 짭짜름한
지원금(사실은 세금 돌려받기)이 고맙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제 학진은 더이상 단순
지원기관이 아니다. 학문 줄세우기를 본격화한 지 오래다. 배고픈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은
연구교수 등 각종 지원책에 목숨을 걸고 있다. 가장 맑고 영민하게 연구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펼쳐야 할 학문 후세대들부터 줄서기에 몰두한다. 인문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10여년간 학진의 지원을 받은 연구들이 엄청 이루어졌는데 인문학이 중흥되었다는
소식은 없고 위기의식(돈 없다는 목소리)만이 강조된다. 재탕·삼탕 연구, 표절 및 중복 등이
만연하고, 국가적으로 약속된 연구만 수행하는 반인문적 현상이 만연되고 있어 ‘돈이 없으면
연구도 안한다’는 상식이 만연되었다. 학자의 능력은 연구논문보다 연구비 신청서 작성과
자금 유치로 결정된다. 그나마 학진을 해체하고 통·폐합된 거대 조직으로 키운다고 한다.
이제 인간 양심의 최후 보루인 인문학조차 국가주의의 냉혹한 부름에 응할 뿐이다.
‘야만으로 가는 길’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주강현 |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
Posted by FaderMan
: